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판옥선과 이순신해전,명량해전전술,칠천량해전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은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의 모습.. 이순신해전에 빠질 수 없는 군선이었던 판옥선과 가슴아픈 역사지만 이순신 장군이 다시 3도 통제사로 돌아올 수 있었던 칠천량해전..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은.. 명량해전전술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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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전술인 김한민 감독의 명량이 개봉 6일 만에 전국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흥행 역사를 새로 써가고 있죠(오늘이 8월 5일이니까 그 숫자는 더 높겠네요)

 

 

영화는 제목 그대로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으로 333척의 일본 수군을 격파했던 기적과도 같은.. 세계 역사상 위대한 전쟁으로 회자되는 명량대첩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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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수군은 명량해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내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했는데요. 비록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을 사실상 전멸시키며 체면치레를 했다고는 하지만.. 칠천량해전에서의 승리는 비열한 계책으로 이순신 장군을 쫓아낸 뒤 자리를 꿰찬  원균에 대한 기습 공격을 통해 얻어낸 것이었으니 온전한 승리라고 보기 어려운 칠천량해전이라고 합니다.

 

 

 

일본수군은 거의 모든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대패했고..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과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은 과연 어떤 장군이었는지 한 번 알아 볼까요?

 

이순신이 평생 동안 세운 전적은 23전 23승 무패.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거북선은 미국 워싱턴의 전쟁 기념관, 영국 바다 역사 박물관을 비롯하여, 중국 ,도이칠란트, 프랑스,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각국의 평가도 이순신이 세계적 영웅이었음을 증명해줍니다.

 

 

국내에서의 이순신 장군 평가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 …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선조,《卒逝後賜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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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
《人皆謂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사관(史官)》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서애 유성룡》

 

 

무후(제갈량)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순신)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제갈량)가 죽은 뒤엔 한(漢) 나라(촉한)의 종실(宗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 《연천 홍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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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해를 다시 손 본 공로다"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와키사카 야스하루>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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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일본 해군준장, 사토 데쯔라로>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NELSON(1758-1805)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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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승전 축하연 답사에서-일본 해군제독, 토고 헤이하찌로>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출처: "朝鮮役(조선역)- 일본 석학, 토쿠토미 테이이찌로>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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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 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이조사 대전)저자, 아오야 나기(靑柳南冥)>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川田功 )>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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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영국 해군준장 G. A. Ballard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Nelson,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세계 각국의 해군 사관 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세계 4대 해전을 가르치는데

1)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2)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3)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한산대첩(閑山大捷)
4)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그 중,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가장 최고인 것으로 평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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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이라고 하는데요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렇게 묘사했을까요?

 

해전 사상 예전과 앞으로도 없을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을 보니

그 위엄이 대단하네요^^

 

 

이순신해전.명량해전전술은?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난중일기>, <백사집>, <난중잡록>, <재조번방지>, <백호전서> 등에 나타난 이순신해전인 명량해전전술의 기록들을 알아볼까요?

 

이순신해전인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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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그런데 <임진잡록>은 이 대목에서 ‘누가 원균에게 돌을 던지겠느냐’고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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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척의 배로 131척에 이르는 왜적선을 상대한 이순신 장군은 “왕명을 받은은 우리는 의리에 죽고 살아야 한다”고 결사항전을 외쳤다.

 

“원균보다 충의를 다한 자와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고?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면 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다닌 자에게는 무슨 죄를 줘야 할꼬?” 어쨌든 복귀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고 한다.

 

“임진년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곧장 돌진해 오지 못했던 것은 우리 수군이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13, 부록5 행록1)

 

 

이순신해전,명량해전전술..

그에게 남은 배는 단 10여 척 뿐이었다.

중과부적을 절감한 이순신 장군은 물살이 빠른 명량구에 진을 쳤다.

그는 휘하장수들과 함께 “우리는 함께 왕명을 받았다.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굳게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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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련한 필살기가 있었다.

 

단 10여척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

그는 백성들의 피란선 100여척을 이용하기로 한 명량해전전술을 펼친다.

 

전선 10여척을 앞에 두고 그 뒤에 피란선을 죽 늘어놓아

마치 100여척의 전선이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명량해전전술을 펼친 것이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지자 장군은 두려움에 떨고 소극전을 펼치려는 휘하장수들을 독려,

마침내 적선 31척을 깨드리는 전과를 세운다.

 

이 와중에서 적장인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목을 잘라 효수한다.

구루지마는 각종 문헌에서 ‘내도수(來島守)’, ‘마다시(馬多時)’, ‘뇌도수’ 등으로 표기돼있다.

 

 

칠천량해전

칠천량해전이란

1597년(선조 30)에 발생한 정유재란 중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패한 해전인데요. 칠천량해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1월에 조선을 재침입했는데요. 이때 조선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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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는데요

 

이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고 해요. 이에 도원수(都元帥)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으로 벌한 뒤 급히 한산도 본영으로 돌려보냈는데요

 

본영에 돌아온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하기 위해 3도 수군의 전선 160여 척을 다 출동시켰지만 부산진포구의 일본 수군은 미리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란작전을 유도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요. 여기에서도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의 영등포로 후퇴했다고 해요

 

조선군은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는데요. 15일 밤에 도도·와키자키·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수륙양면기습작전에 말려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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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접전했으며, 경상우병사 배설은 전세를 보고 있다가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갔다고 해요. 원균은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여 결국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도망쳤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죽은 조선 수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이 해전으로 3도수군통제사인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전사했는데요. 이로써 조선의 3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함대는 서쪽 해상을 향해 쳐들어가 일본군의 남원 및 진주로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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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이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흩어진 병력과 배를 수집·점검할 것을 명했는데요. 같은 달 22일에는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3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충청수사로 권준(權俊)을 기용했으며 뒤이어 전라우수사에 김억추(金億秋)를 임명했다고 합니다.

 

 

판옥선 판옥선에 대해 알아 볼까요?

판옥선은 조선시대에 널빤지로 지붕을 만든 대표적인 군선인데요. 조선 전기의 군선은 조운(漕運)을 겸하는 맹선(猛船)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군용으로서 제 구실을 못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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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6세기에는 삼포왜란·사량왜변·을묘왜변 등 변란이 속출했는데, 맹선으로 왜구를 제압하기 힘들었답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군선 개발에 부심한 결과 1555년(명종 10) 새로 개발해낸 것이 판옥선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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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구조와 기능 등 모든 면에서 종래의 군선과는 아주 다른 혁신적인 전투함이었다고 해요. 우선 그 구조에 있어서 종전의 군선인 맹선은 갑판이 1층뿐인 평선(平船)인 데 비하여 판옥선은 선체(船體)의 상면(上面)에 상장(上粧)을 가설하여 2층 구조로 만든 배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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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조는 마치 건물의 2층과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어서 노역(櫓役)에 종사하는 노군(櫓軍)들이 상·하 갑판 사이의 안전한 장소에서 마음놓고 노를 저을 수 있고, 전사(戰士)들은 상갑판(上甲板) 위의 높고 넓은 자리에서 노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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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구조로 인해 적이 접근하여 배에 뛰어들기 어렵게 되었는데요. 종래의 군선에 비하면 선체가 커서 노군의 수를 증가시킬 수 있었고, 이에 노 1자루당 5명의 노군이 배치됨에 따라 기동성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판옥선은 임진왜란중 각 해전에서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여 조선 수군이 완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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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底板) 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정도로 파격적으로 컸는데요. 후대로 내려오면서 크기가 점점 커져 정조 때는 통제사가 탑승하는 통영상선(統營上船)이 저판 길이 90척, 일반 판옥선이 저판 길이 70척 정도였고 탑승인원도 160명 내외로 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판옥선은 전선(戰船)으로 개명되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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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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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찾아온 성웅 이순신 장군..

 

이처럼 열광하는 이유는....

이런 뉴 리더십을 갖춘 인물을 갈망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